등(燈)의 유래

가난한 여인의 등불 [貧者一燈]

등(燈)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등을 공양하는 의미는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합니다.
현우경 빈녀난타품에 등불에 얽힌 일화가 내려옵니다. 

부처님이 영취산에 계실 때의 일로 밤을 밝힌 다른 등들은 다 꺼졌으나 왠일인지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밝힌 등불 만이 끝까지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부처님께서 "이 여인은 등불 공양의 공덕으로 성불할 것이다" 라는 말씀하시며 물질이 많고 적음을 떠나 지극한 서원과 정성으로 밝히는 등이 소중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이 일화로 보아  부처님 당시부터 등공양 풍습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신라 '간등(看燈)'
신라 경문왕 6년(866) 정월 15일과 진성여왕 4년(890) 정월 보름에 황룡사로 행차하여 연등(燃燈)을 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등을 보았다'라는 의미의 간등(看燈)은 1000여 년 전에 이미 사찰에서 등을 밝혀 연등회를 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연등회(燃燈會)'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던 시대였습니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는 팔관회와 함께 연등회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연등도감을 설치하고 연등위장을 제정할 정도로 국가적인 행사로 치렀습니다.
음력 정월 보름과 2월 보름에 국왕과 온 백성이 풍년을 기원하며 궁궐부터 시골까지 화려한 연등을 밝히고 잔치를 열고 가무를 즐겼습니다.
왕이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가두행진의 길 양 옆에는 이틀밤에 걸쳐 3만개의 등불을 밝혀 불빛이 낮과 같이 밝았다고 합니다.

조선 관등(觀燈)

조선시대의 건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 주관의 연등회는 중지되었으나 민간에서는 민속행사로 남아 세시풍속으로 전승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종이를 잘라 등대에 매달아 기를 만들어 들고 장안을 돌아다니며 쌀이나 돈을 구하여 등을 만드는 비용으로 쓰던 호기놀이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오며 성행하였고, 집집마다 장대를 높이 세우고 자녀의 수대로 등을 밝혔고, 거리 곳곳에 형형색색의 등을 달았습니다.

밤에는 장안의 남녀노소가 등을 들고 나와 돌아다니고 불꽃 바다를 이루어 그 장관을 구경하는 관등놀이가 성행하였습니다.
남산의 잠두봉에 올라가 연등을 내려다보는 것을 1년 중 가장 큰 구경거리로 여겼으며 운종가 관등은 서울의 열 가지 경치, 즉 경도십영 중의 하나로 유명하였습니다.

1955년 조계사 부근에서 제등행렬을 한 것이 현대 연등행사 시작입니다. 1975년 사월 초파일이 국가 공휴일로 제정되어 더욱 많은 인원이 연등행사에 참여를 하였고, 1976년부터는 여의도광장에서 조계사(종로)까지 이르는 연등행렬을 하였습니다.

1996년부터는 동대문운동장-조계사에 이르는 연등행렬을 비롯하여 전통문화마당, 어울림마당(연등법회), 회향한마당(대동한마당) 등으로 진행되어 고려나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인 국민축제로 전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주연등회 1983년부터 금산사를 중심으로 전주완주근교의 사찰들이 함께 시작하여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1,200여 년 오랜 역사와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고 있는 연등회는 무형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4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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